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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괜찮다, 다 괜찮다

yuhyje 2014. 7. 23. 22:15





괜찮다, 다 괜찮다 / 공지영 / 민음사





공지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야 깨달았다.

내가 늘 하고싶었던 말을 다 해 주는 분이구나.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 

사회의 뜻 모를 화살을 맞아 가면서도, 그것을 웃음으로 가볍게 쳐 내는 여유를 보였다.


이렇게 멋진 공인의 이야기를 왜 이전엔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는지. 언론이 만들어내는 대중적 선입견은 무섭다. 


다음은 메모.



"이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도 없고, 똑같은 눈송이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원본이다."

어떤 신부님의 말씀이에요. 남들 눈에는 하나는 삐뚤어져 보이고, 하나는 벌레 먹어 보여도 그게 다 원본이고, 완벽한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평화를 얻었죠.


지금도 사실 가톨릭 작가가 세 번이나 이혼했다고 심기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느님도 우리 아버지처럼 "네가 이혼하는 것도 싫지만 네가 불행한 것은 더 싫다"고 말씀하실 것 같아요. 나를 조금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도 그러는데, 많이 사랑하는 성인이 그 정도 말을 못 할까 싶거든요.


동갑내기 신부님과의 대화.

"<수도원 기행> 만 안 썼어도 제가 이혼을 할 텐데, 하느님한테 기껏 돌아옸다고 해놓고 이혼을 하면 하느님 망신이잖아요."

"하느님이 공지영 씨보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요? 또 알아요? 공지영 씨가 세 번이나 이혼했다고 위안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


지승호 : 나이 드신 분들의 평인데, "20대, 30대 여성들에게 공지영의 소설이 나쁜 물을 들인다" 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아내나 자식들이 그런 물 들어서 이혼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공지영 : 그런 물이 빨리 들면 안 되는 결혼 생활은 빨리 끝내는 게 낫죠. (웃음) 그리고 그것보다는 자기 아내가 자기로 인해 얼마나 행복하지 먼저 살펴봐야 되는 거 아닌가요?

지승호 : 그걸 모르니까 나중에 황혼이혼을 당하면서 "도대체 왜 그러나? 난 잘해줬는데" 라고 하잖아요. (웃음)

공지영 : 내가 힘이 없어지니까 버리는구나, 그러겠죠. (웃음)


이혼과 가족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서술이었다. 유교적 덕목을 거스르는 것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나라, 독신자나 이혼한 사람은 하자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나라,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테크를 타면 손가락질 당하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건 분명, 용기 있는 나섦인 동시에 용기를 주는 행동이었다.


공지영 :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나랑 안 맞을 수 있어요. 그러면 같이 살기는 힘든 사람인 거예요. 그럴 때는 잘 헤어져야 하지요. 내가 좋아하는 친구지만 한 방은 도저히 쓸 수 없는 친구들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조금 참는 정도는 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참고, 때려도 맞고,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지승호 : 참는다는 것은 한계가 있고, 어디선가 부하가 걸린다는 얘기니까요. 나중에 폭발할 수도 있는 거고요.

공지영 : 참는 것이 정말 문제라면 아우슈비츠도 아무 문제가 안 돼요.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러면 마취는 뭐 하러 해요? 참으면 되지. 조금 참으면 맹장도 잘라내고 좋게 해줄 건데. (웃음)


이혼의 당위성에 대한 효과적인 비유. 통쾌하기까지 하다. 

콩가루 집안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하여서는 "콩가루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몸에도 좋고." 라는 공작가.

이쯤 되면 쿨한 척이 아니다. 쿨이지.


새벽 두 시. 딸에게 "엄마 원고 탈고했다. 술 마시자" 라고 하는 엄마.

"나는 엄마를 만난 게 아니라 어떤 좋은 여자를 만난 것 같아" 라고 말하는 딸.

<소년을 위로해줘> 에 나오는 엄마와 아들 관계와 비슷하다. 친구 같은 엄마.

자매처럼 모녀도 점차 친구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 연령대가 점차 내려가고 있는 것 같고. 트렌드랄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딸의 위치에 있는 내 생각일 뿐이다. 엄마는 배 아파 낳은 딸이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해가는 모습을 쭉 보아 왔으므로, 딸이 평생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 있겠지. 하지만 딸을 낳아 본 작가들이 그리는 엄마도 저러하니, "엄마들은 결코 딸을 친구로 느끼지 않는다" 는 명제는 최소한 거짓이다.


학교가 천국이라면 아이들이 나와서 어떻게 적응할까 싶어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겪는 것도 일종의 사회화고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선생님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라는 말은 하기 싫었어요. 저도 그렇지 않은 것을 많이 경험했거든요.


"그땐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하지만 널 사랑해" 라고 하면 될텐데, "널 위해서 그랬어" 라고 하면 더 상처를 줄 수도 있지 않나요? 고양이도 누가 저를 사랑하는지 알거든요.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은 나를 한 명의 성숙한 인격체로 대해 주셨다. 어쩌면 나의 책임감은 그 때부터 형성되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가 나를 어린이의 범주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를 어린아이라고 여기는 선생님도 없었고, 덕분에 무탈히 성장할 수 있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존중하고 보는 지금의 나. 그 근원에는 부모님의 배려가 있다.


과거에 존재하는 그 아이가 있잖아요. 그 아이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우리 모두 각자 너무 잘 알고 있어요. 바람이나 기온, 불빛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 아이에게 지금 어른이 된 내가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달래주는 거죠. "괜찮아, 너는 그래도 잘 클 거야. 내가 왔잖아" 라고 하면서, 지금 내가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위로의 말과 격려의 말을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상처가 깊을수록 스무 번 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 날 때마다 하는 거예요. 그 아이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라져요.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는,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방법.


이것 역시 지나가리라.


재의 고통을 견디어내는, 어쩌면 가장 현명한 방법.


내가 믿는 것은 교회가 아니거든요. 물론 교회를 존중하지만, 제가 믿는 것은 그 위에 정신을 제공해주는 신이라는 존재기 때문에 그런 것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아요. 내가 좋아하는 가톨릭 성인들은 다 교회로부터 박해받았어요.


저는 가톨릭을 믿는 게 아니고 하느님을 믿죠. 그것에 보편한 어떤 대표로서 가톨릭을 믿는 거고요. 교회는 저에게 말하자면 학교와 같은 존재에요. 신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곳이지만 그것 자체의 시스템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교에 대해 나의 생각을 표현할 수가 없어서 늘 답답했었다. 이제 그 갈증이 풀렸다.


좋은 문장이라는 것이 과연 뭔지 모르겠어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할 수 없다. 이런 게 명문장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게 미사여구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번역이 되어도 충분히 그 뜻이 전달되고, 전 세계인의 마음에 공감을 얻을 수 있잖아요.


무슨무슨 아이콘으로 주목받는 것이 더 익숙한 공작가. 하지만 작가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글이더라.


작품의 지도를 그려낼 줄 알고, 3차원 조감도를 그려서 유도도 해주고, 비판도 해주고 하는 것이 평론가의 몫.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할 수 있는 일.

베스트셀러가 꼭 명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명작은 베스트셀러였어요.


글은 자본이 가장 덜 드는 예술.

지구를 멸망시키는 것도 한 문장이면 되니까요.


평범하고 그런 것들 속에서 늘 새로움을 찾아나가는 게 저의 기질이에요.


제가 무슨 주의자를 굉장히 싫어하는 이유가, "너는 좌파에다가 페미니스트가 무슨 낙태를 반대하냐?" 고 하더라고요. "아니 내가 반대한다는데 무슨 주의 때문에 내 마음을 바꿔야 돼" 라고 했죠.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일정 부분의 절제와 금욕이 따라오는구나.


사랑. 먼저 상대방이 싫어진 사람이, 아직 상대방이 싫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룰을 지킨 사람이 궁지에 몰려 벌을 받는 유일한 게임.


죄책감의 한 풍경.


문학소녀 때 책을 읽으면 전부 다 고향 얘기를 쓰니까 도대체 나는 왜 서울에 태어나서 이런 것도 못 갖고 있나, 진짜 속상했거든요. 그러다가 외국 작가들, 특히 뉴욕 출신 작가들의 책을 보면서 대도시에서 태어나도 충분히 이렇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극복했어요. 운동권에 들어가면서도 서울내기라는 것이 썩 좋은 얘기가 아니었는데, 그때쯤 서울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서울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어디 갔다 오거나 그러면 서울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항상 아치가 있었어요.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우리의 서울입니다." 저는 멀리서부터 그 간판을 보면 눈물이 핑 돌곤 했어요. 시골을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이 언덕을 돌아 고향 마을이 보일 때부터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이상해지는 것처럼, 그랬어요. 그 전에는 내가 서울을 고향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창피해서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문학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 그때부터는 서울을, 내가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도 될 것 같았어요.


예술은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다.


소설가는 이중의 책무를 지닌다. 모든 사람의 개별자 속에서 시대의 공통점을 추출해내고, 거기에 다시 개별의 옷을 입혀야 된다. 그것이 전형이다.


등단은 서른다섯 넘어 하기를 권합니다.


세계 대가의 작품들을 보면 다 돈 얘기예요.

세상 모든 사람이 돈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것이 일상의 거의 80퍼센트는 될 거예요. 그런데 소설가가 돈 빼놓고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거기에 감정이입을 못 하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똑같은 것을 느껴야 한다는 건데, 사실은 그것보다는 반 발자국만 올라가 있어야 되는 거죠. 한 발자국 올라가면 예수나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 경계 속에서 얘기를 해줘야 하는 것이 소설가가 아닌가 생각해요. 동력이 뭐냐고 물어보면 저는 돈이라고 얘기하거든요. 나는 프로 작가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쓴다고 얘기해요.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그렇지만 돈만을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명심해줬으면 좋겠다" 고 얘기를 하죠.


외국에 산다는 일은 어쩌면 문화의 진공관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야.

거긴 지옥 같은 천국이고, 한국은 천국 같은 지옥이라니까요.


문화의 진공관. 나도 문화의 진공관에서 이 글을 읽었더랬지.


결코 별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별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별을 가리킬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자는 오직 독신들뿐. 격려와 조언의 속성도 좀 그런 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너무 이해하게 되면 얘기하기가 힘들고요.


소주잔은 잔으로 부딪치지만 와인을 마실 때는 눈으로 부딪칩니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지요.


우행시의 장마다 나오는 유정이 일기.

유정이의 시점을 따라가지만, 유정이가 가진 느낌을 거꾸로 환치시키는 장치.


우리의 우리 안에는 내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싫다/좋다" 의사를 표시해야 될 문제에 대해서까지 "반대한다" 고 말하거나 가치판단을 하려고 들거든요. 용서할 수 없다고 하고. 아니 자기가 왜 용서를 해요.


서로가 공개하고 믿자는 건데, 믿으면 오히려 그걸 볼 필요가 없잖아요. 사람이 프라이버시라는 영역이 있는 건데.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해도요. 저는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그럼 남이지, 지가 나야?


일단 책은 읽는 것이 즐거워야 해요.

문자라는 것은 달콤한 것이라는 감각이 진하게 각인되도록 하는 유태인의 알파벳 교육.


우파가 예의바르고, 보수라는 가치는 아름답고.

보수는 예의를 중시하고, 형식미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안티는 항상 메인에 기생을 해야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안티 운동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담론이나 거기에 상응할 수 있는 것들을 키워내고 만들어내는 것이 궁극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이 궁극의 목표를 잃고, 안티만 해서 잘라버린다면 위험하거나 비생산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말의 묘미는 조사와 부사에 있다.


대중에게 영합해서 책을 팔다니....

이걸로 밥을 먹어야 되니까 당신들이 뭐라고 얘기하든 파는 것은 맞다. 그 대신 상품의 질을 좋게 하겠다.


안전을 추구함으로서 얻는 이익과 모험을 함으로서 얻는 이익의 질은 다르거든요. 우위는 없어요. 거기서 선택한다고 생각해요. 상처 안 받고 쿨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있겠다는 얘기잖아요. 그 사람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을 거고요.


내가 지향하는 것은 후자인데, 전자의 매력도 뿌리칠 수는 없다. 졸업을 앞둔 시점, 다시 한 번 고개를 드는 고민의 뿌리.


모든 게 잘될 거야, 하는 것도 위험한 생각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이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읽어서 나쁜 책은 없는 것 같아요.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있지만.


신경숙 씨가 <깊은 슬픔> 으로 승부하는 것하고 내가 <우행시> 로 승부하는 것 하고는 사회적인 파장이 다른 거니까요. 하나는 문화면에서 다루는 거고, 하나는 사회면에서까지 다뤄지는 거잖아요.


영화도 마찬가지 아닐까. 플롯과 주제에 따라 완전히 다른 콘텐츠로 분류된다. 몇 가지 안 되는 장르로 영화를 구분짓는 것은, 관객들로부터 바른 선택의 기회를 앗아갈 수 있다.


사실, 나에게 있어 이 책은 그냥 "공지영 책" 일 뿐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에는 "지승호와 공지영의 책" 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승호의 힘은 소같이 묵묵히 들이대는 물량의 힘일 거야. 


공지영이 지승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다음은 지승호의 후기.


인터뷰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녹취를 푸는 과정이 행복하지만은 않다. 사실 매우 힘든 육체적, 정신적 노동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즐겁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카리스마가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리스마, 하면 흔히 최민수식 카리스마를 떠올리기 쉬운데,  카리스마라는 단어에는 "매력" 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오늘은 9월 18일이다. 6월에 읽은 책의 후기를 두 달 반만에 완성한 셈.

하지만 그 덕분에 읽고 읽고 또 읽으며 내용을 곱씹을 수 있었다. 오래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