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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23 Film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yuhyje 2014. 11. 24. 20:37



2014년 11월 23일

학교 기숙사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2009)

Into The White Night

박신우 감독 / 손예진 고수 한석규 이민정 박성웅





문학작품이 영상화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더구나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원작을 한 번 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백야행>. 일본 드라마로 재탄생한 것이 2006년인데 3년 후, 한국에서 다시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 포스터가 국내 영화관 곳곳에 걸려 있을 때, 막연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손예진 주연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어중간한 중박을 치고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남겨 두었더랬다.


그러다 올 해 초, 베를린에서 드라마로 몇 편을 보게 되었다. 일본 스토리텔링 특유의 어둑하고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느릿느릿 진행되었던 극의 초반. 료지와 유키호라는 두 인물이 평생에 걸쳐 빛과 그림자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와 같은 전개 덕분이었다. 역으로 보면, 박신우 감독의 백야행이 대박을 칠 수 없었던 건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명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드라마 <백야행>. <태양의 노래>도 빛이 없는 어둠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다.

그런 스토리들에 약간 적응이 되어서 그런지, 먹먹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찍을 때에는, 해당 작품에 대한 제작진의 완벽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스토리를 접하고 파악해서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나 입체적으로 작품을 이해해 버리므로 관객들도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을 거라 착각하기 쉽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설명이 부족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잠재적 관객 가운데 기존 작품을 접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다면 할 말이 없다. 애초에 그들만을 타겟으로 삼았다는 뜻이니, 상업영화 제작진으로서의 자격 미달이다.


하지만 영상미는 가히 감동 그 자체였다고 말하고 싶다. 명암 조절로 극 전체를 관통하는 '빛'이라는 테마를 살려내었고, 공간의 색깔과 배우들의 시선 방향까지 디테일하게 설정함으로써 콘트라스트를 극대화시켰다. 가장 압권이었던 장면은 요한이 죽어가며 바라보는 미호의 에스컬레이터 신. 미호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어린 시절의 미호로 바뀌는 모습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기둥이나 벽체와 같은 장애물을 기점으로 인물의 형태가 바뀌는 영상처리는 이제 흔하게 볼 수 있는 기술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적재적소라고 느껴졌던 것 같다.




빛과 그림자. 교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시선. 미호와 요한의 처절하고도 철저한 대비다.




극의 전개에 때른 콘트라스트도 상당했다. 어둑하고 불안정하기만 했던 메인스트림이 종결된 뒤, 에필로그 형식으로 등장했던 둘의 셀프카메라 신. 풋풋하고 찬란했던 이들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밝아 보이던지. 진짜 태양 아래에 나란히 앉은 둘의 모습이 아름답다. 시선은 반대 방향일지라도.




<백야행>의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있단다. 각 인물을 색깔로 설정해서 보여준다는데, 찾아봐야겠다.



찾아보니 박신우 감독은 시각디자인 전공자다. 한예종에서 전문사 과정 중이시라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영상전문가들이 많은 상업영화를 찍을 여건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탄탄한 원작의 영화화라는 출발은 아주 긍정적이다. 좋은 영상미가 좋은 스토리에 얹어져야 더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이 덕분에 좋은 스토리를 접할 수 있게 되니까. 일석이조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