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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ook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내 생애의 밑줄 1
    글상/Contents 글 2013. 4. 29. 11:58



    그저 정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가 박완서가 그렇다. 옆에 계시다면 선생님 하고 나지막이 부르게 될 것만 같은 인품. 이 분의 소설과 수필에서는 맑고 따뜻한 무언가가 엷고도 진하게 배어나오기 때문에, 속이 상하거나 지치고 힘들 때면 마치 갈증에 힘겨워하다 물을 찾듯이 찾아 읽곤 했었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괜한 의욕 저하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곤 했었다. 그 때 건축학과를 선택할 걸 그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고 연구실 선택에 대한 불안감으로 넋두리가 늘어만 갔다. 그래서 학부때처럼 찾은 과도 2층 인문서적 서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주저 없이 책을 뽑아들고 나왔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박완서 / 현대문학

    1부_내 생애의 밑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내 소유가 아니어서 욕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자유와 평화, 그게 바로 차경의 묘미 아니겠는가. 내가 더 늙고 힘에 부쳐 우리 마당이 볼품없는 쑥대밭이 된다 해도 저 숲의 사계절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전쟁만은 피해야지 하는 마지막 평화주의.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전쟁에 대한 공포의 다른 이름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금년은 또 경인년이다. 나에게는 그냥 경인년이 아니라, 또 경인년이고 또 경인이기 때문에 내 생전에 또 전쟁을 겪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중략)...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입학식 치르고 며칠 다니지도 않아 6.25가 났다. 집안 남자들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 굶주림, 폭격과 기총소사, 혹한의 피난길, 그 와중에서도 좌냐 우냐 하는 이념에 따라 혈육과 가정이 분열하고, 이웃과 친척, 직장 동료끼리도 서로 헐뜯고 고발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사람 나고 이념 난 게 아니라 이념이 인격이나 사람다움 위에 군림하던 전후의 공포 분위기, 이청준의 소설에도 나오는 전깃불 뒤의 어둠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다짜고짜 우리 얼굴에 불빛을 쏘아대며 빨갱이인지 반동인지를 묻는 오만한 심문자,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내 정체성... (후략)


    하나의 생명의 소멸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의 소멸과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몇백만 분의 일이라는 숫자 안에 도매금으로 넘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피붙이만은 그 도매금에서 빼내어 개별화시키고 싶었다. 몇백만 분의 일이라는 죽은 숫자에다 피를 통하게 하고 싶었다. ... (중략) ... 그래서 늦은 나이에 소설이라는 걸 써보게 되었고, 비교적 순탄한 작가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치유받고 위안을 얻은 것처럼 느낀 것도 사실이다. 6.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울궈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은 한 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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