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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ook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내 인생의 밑줄 2
    글상/Contents 글 2013. 5. 2. 02:16



    게임특강 수업에서 과제 대신 진행하는 UNESCO IFPC 프로젝트 때문에 최근 며칠은 조금 바빴다. 오늘은 제안서를 거의 마무리하고, 조교 겸 우리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언니의 생일을 축하한 뒤 돌아왔다. 훈련 없는 수요일이라 늦잠을 자서인지 크게 피곤하지 않은데다가, 금세 읽는 습관 만들기에 소원해졌던 것 같아서 반 강제적으로 책을 펼쳤다. 

    차분히 읽기 시작하긴 했다만, 괜시리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분이었다. 고향이 있다는 것과, 그 곳에 언제나 자유롭게 들를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박완서 / 현대문학

    1부_내 인생의 밑줄


    내 식의 귀향

    이제 많이 살아 친인척 간에 제일 연장자가 됐으니 가만히 앉아서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맞는 입장이 됐다고 해도 도리를 못다 한 것 같은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아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 그리움일 것이다. 저 지는 잎들이 어찌 섭리만으로 저리도 황홀하고 표표하게 몸을 날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처럼.


    다만 차도에서 묘지까지 내려가는 길이 가파른 것이 걱정스럽다. 운구하다가 관을 놓쳐 굴러떨어지면 혹시 저 늙은이가 살아날까 봐 조문객들이 혼비백산할테고 그건 아마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농담이 되겠지.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정 회장은 정 회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 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신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나도 금강산 관광까지는 다녀왔지만 개성 관광엔 저항을 느꼈다. 어떻게 고작 6~7킬로미터 밖에 선영이 있는 고향 마을을 놔두고 개성 구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성 관광을 제안 받았을 때 나 홀로 경로 이탈을 해서 고향 마을 박적골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원을 말해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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