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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ook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내 생애의 밑줄 3
    글상/Contents 글 2013. 5. 6. 12:28



    사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함께 술 한 잔 하고싶은 사람, 같이 맛있는 밥 한 끼 먹고싶은 사람, 마주앉아 커피나 차 한 잔 나누고 싶은 사람.

    박완서 선생님께는 정말 맛있는 밥을 한 끼 해 드리고 싶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되찾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으면서도 이런 가슴 따뜻한 글을 적어오셨다면 분명 나의 밥을 맛있게 드셔주실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을까.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박완서 / 현대문학

    1부_내 생애의 밑줄


    유년의 뜰

    우리 마당의 흙은 비행기 타고 온 종보다는 바람 타고 온 종을 더 반기는 것인가. 옛날 옛적에 떠난 내 유년의 뜰이 나를 따라온 것인가.

    그런 동네들은 소박하다기보다는 인기척 없이 퇴락해서 나도 잠시 물질이 아닌 넋이 된 것처럼 이 집 저 집 빈집에 남은 남루한 살림의 흔적들을 기웃대기도 하고 툇마루에 앉아 무너진 돌담 너머로 넝쿨 식물들이 끼고 도는 장독대와 멀리 자운영 꽃이 질펀한 들판을 바라보기도 한다.

    인간의 참다움, 인간만의 아름다움은 보통사람들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어 있는 것이지 잘난 사람들이 함부로 코에 걸고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문학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건 진실인가. 말로 표현된 것의 자유와 한계, 읽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조작한 이미지, 경박한 과장, 분식(내용이 없이 거죽만을 좋게 꾸밈)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흐르는 강가에서

    작금(어제와 오늘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이 나라 민심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옛날의 우리 엄마보다 훨씬 더 도시, 특히 서울 지향적이다.

    그 길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이르면 아름다운 강은 위대한 강으로 변한다. 이건 강이 아니라 바다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본 유럽문화를 꽃피운 온갖 강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애걔걔 그것도 강이라고... 무시해주고 싶은 치기(어리고 유치한 기분이나 감정)까지 발동한다. 그런 기분은 아마도 유럽문화에 압도된 상처나 열등감의 반작용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 민족 본연의 호연지기(거침 없이 넓고 큰 기개)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다만 바퀴 없는 이들의 편이다

    그 겨울의 추위가 냉동보관시킨 기억은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보관된 식품처럼 썩은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차라리 질병이다 기억 중 나쁜 기억은 마땅히 썩어서 소멸돼야 하고, 차마 잊기 아까운 좋은 기억이라 해도 썩어서 꽃 같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을.

    나도 그때 생리만 멎은 게 아니라 성장도 멎어버린 것 같다. 반세기도 넘어 전의 추위, 굶주림, 불안, 분노 등 원초적 감각의 기억은 그로 인하여 감기도 걸릴 정도로 현실적인 데 비해 현재 누리고 있는 소비사회의 온갖 풍요하고 현란한 현상들은 그저 꿈만 같다.

    어쩜 그렇게 혹독한 추위 그렇게 무자비한 전쟁이 다 있었을까.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 믿는다.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바퀴 없는 자들의 편이다.



    아아, 남대문

    1930년대의 서울역 광장. 당시만 해도 남대문 주위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다. 남대문 홀로 크고 장엄했다. 하여 남대문로 양쪽의 건물들이 납작 엎으려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남대문이 위압적인 건 아니었다. 대도시의 혼잡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조그만 계집애에게 괜찮다, 괜찮아, 라고 다독거릴 듯 인자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울 사람이 됐다. 

    눈에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들어왔어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을 것이다. 남대문과 나 사이에 아무런 불순물도 안 섞인 완벽한 만남은 최초의 한 번으로도 축복인 것을.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과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화선지에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도 넘쳤다.

    어떤 극한상황에서도 우리를 덜 절망스럽게 하고 희망과 꿈을 갖게 하는 거야말로 바로 문화의 힘일 터이다. 그건 또한 문화민족이라면 문화재가 있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쳤던 것은 방화범 개인의 뻔뻔함이 아니라 아무리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받들어온 경제제일주의가 길들인 너와 나의 얼굴, 그 황폐한 인간성에 대해서였을 것이다.


    < 백범일지 >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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